[창간79돌 특집/화제인물]현주컴퓨터 김대성사장

기사입력 1999-03-31 19:25:00 기사수정 2009-09-24 07:35:05

 

 

키 1백50㎝도 채 안되는 꼬마 소년에게 신문 배달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가방보다 더 큰 신문 뭉치를 들고 서울 이태원 고갯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온몸은 늘 땀투성이가 됐다.

 

국내 굴지의 PC제조업체인 현주컴퓨터 김대성(金大星·36)사장은 매년 동아일보 창간기념일이 다가오면 중학생 때인 70년대 후반 동아일보를 배달하던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살던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스스로 용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에서 방과후에 동아일보를 배달했죠.”

 

2백부 남짓한 신문을 한달 동안 빠짐없이 돌리면 6천원이 손에 쥐어졌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번 돈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한때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을 다잡아 처음에 목표로 했던 기간을 기어이 채웠다.

 

김사장은 89년 단돈 30만원을 밑천으로 용산전자상가에서 조립PC 사업에 뛰어들었다. ‘제일 싼 PC’를 모토로 대학시장을 집중 공략해 10년만에 매출액 1천억원이 넘는 탄탄한 중소기업을 일궈냈다.

 

그의 눈부신 성공에는 어릴적 신문배달을 하면서 키워온 ‘해보자’는 도전정신과 고객에 대한 책임감이 밑거름이 됐다.

 

경제난으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렸던 지난해 현주컴퓨터는 초저가를 무기로 오히려 매출을 100%이상 늘렸다. 올해 매출 목표는 2천억원.

 

“‘현주’가제첫사랑애인의 이름이라고 소문이 나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주’자는 ‘술 주(酒)’자입니다. 저희가 판매한 PC를 통해 여러 사람이 즐거웠으면 하는 뜻을 담았죠.”

 

배달소년 시절의 추억 때문일까. 요즘도 김사장은 많은 신문 중에서 동아일보를 제일 먼저 집어든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의리가 있는 신문입니다. 배달 시절에도 동아일보를 보는 사람 가운데는 나쁜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홍석민기자〉smhong@donga.com

촌평) 2013.0506.1834 =  1987년 겨울, 나는 중앙일보 배달했지 ^^

 

 

쓰러지지않는 '38세 거인' 김대성사장,

그의 성공에 숨은 컬러마케팅을 살펴보세요

 

| 커피한잔과 여유를 즐길까?  정기 | 조회 35 |추천 0 | 2002.10.28. 14:14

 

[CEO 리포트] 쓰러지지않는 '38세 거인' 김대성사장, 그의 성공에 숨운 컬러마케팅을 살펴보세요


현주컴퓨터 김대성(金大星) 사장은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답지 않게 신고(辛苦)의 14년을 보냈다. 1989년 9월 서울 용산 나진상가 19동 2층에 손바닥만한 가전매장을 연 이래 “잘 나간다 싶으면 꼭 마(魔)가 껴서” 절벽끝까지 갔다 오기를 다섯 차례.
김 사장은 한 마을에 너댓 장씩 나뒹굴 정도로 흔한 박사학위는커녕 2년제인 신구대 경영학과 졸업이 최종 학력이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종자돈도 없었지만 보도블럭 틈새에 핀 민들레처럼 질기게 버텨왔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용산에서 PC조립업을 하던 친구를 도와주던 중 거래처 사장이 보증금 없이 월세 12만원에 매장을 빌려줘 ‘현주’라는 간판을 올렸습니다.”

그는 당시에 PC만이 아니라 TV, 냉장고 등도 판매했지만 어느 제품 하나특별히 잘 팔리는 게 없어 89년 12월 PC 전문매장으로 업종을 바꿨다. “한 달에 PC 20대 정도가 팔려 이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기업이란게 정체하면 쓰러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 사장은 그동안 모아놓은 고객 리스트를 1주일 내내 꼼꼼히 분석했다.그 결과 고객의 70~80%는 대학생이고 이중 공대생의 구매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진리’를 찾았다.

그는 당장 서울시내 대학의 공대 학생회, 컴퓨터 동아리 등을 돌며 가장좋은 부품으로 만든 PC를 다른 업체보다 마진을 50% 줄여 팔겠다고 입소문을 냈다.

결과는 놀라웠다. PC 판매량이 10배나 뛰어 매월 200대씩 팔려 나갔다.이때 첫 번째 마가 찾아왔다. 대학 축제와 중간고사가 겹쳐 매출이 뚝 떨어진 90년 9월 협력업체의 사장이 부탁한 어음 배서를 들어줬다가 부도를맞은 것.

“직원을 24명에서 4명으로 줄이고 점포도 5개중에서 3개나 처분했어요.” 김 사장이 거기서 쓰러졌다면 물론 오늘날의 현주컴퓨터는 없다.

공대생만 붙잡고 장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도입한 것이 이른바 ‘대자보 마케팅’. 눈 에 확 띄는 노란색 바탕종이에 검은색의 글씨로 현주컴퓨터 제품의 사양과 부품별 가격 등을 상세히 적은 대자보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단국대 등에 붙여 홍보하자 ‘돈을 긁어 모을’ 정도로 판매량이 뛰었다.

게다가 업계 최초로 시도한 단과대, 학생회, 학과, 동아리 단위를 대상으로 한 단체판매가 대박을 터뜨려 현주컴퓨터는 일약 삼성전자, 삼보컴퓨터 등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이르렀다.

잊을 만하면 위기는 찾아왔다. 92년 말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단속의 유탄을 맞아 25일간 옥살이를 해야 했고, 98년에는 거액의 환차손을 입어 부도직전까지 몰렸다.

다들 움츠리던 환란 당시 김 사장은 오히려 공격적인 전략을 폈다. 월광고비를 5,000만원에서 3억원으로 늘리고, 영업인력을 대거 확충하는 등초강수를 두었다. “당시만 해도 현주컴퓨터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저자신도 몰랐습니다.”

김대성 사장은


1964년 강원도 춘천1984년 우신고등학교 졸1986년 신구대 경영학과 졸1986년 한국종합전산 입사1988년 서울컴퓨터 입사1989년 현주컴퓨터 설립2001년 연세대 최고경영자과정 김 사장은 장기 침체에 빠진 지금의 PC시장도 결국에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임을 확신한다. “PC 교체주기가 10년 전만해도 1년이었는데 최근에는 5년 정도로 늘었습니다. 시장의 규모가 줄어든셈인데, 이럴 때는 경쟁자와 싸워서 영토를 넓히면 됩니다. 국내, 해외 가릴 것 없이 특화상품으로 시장을 장악해나갈 겁니다.”

김 사장은 자기 회사의 강점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당좌수표와 어음을발행하지 않고, 은행빚이 없으며, 대기업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독자적으로노트북을 개발했고, 전사적 자원관리(ERP)가 완벽히 구축되어 있습니다.”김 사장은 이를 토대로 해외시장을 공략하고 인터넷폰, PC방’, 노트북 등제품과 사업 다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나아갈 때와 후퇴할 때를 분명히 구분한다. “올 초 직원들이 연간 판매목표를 36만대로 책정한 것을 보고 혼을 낸 뒤 30만대로 수정했습니다.

기업의 수명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는데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다 보면 제 수명도 못 누리게 되죠. 현재 역량에서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만족하는 경영자가 되겠습니다.

글=김태훈기자 oneway@hk.co.kr사진=조영호기자/한국일보 2002-10-27 17:16:03

 

 

 

 

현주컴 창업주 김대성씨, 이안컴퓨터[EAN PC] 설립

 푸른 바람 2007.03.21

 

 '용산PC신화'의 대명사로 불리며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현주컴퓨터의 창업주 김대성씨. 그가 다시 PC 업계로 돌아왔다.

그는 지난해 12월 이안컴퓨터를 설립, 현재 이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김 대표는 이안컴퓨터 홈페이지(www.eanpc.com)를 통해 "현주컴퓨터를 떠난 뒤 많은 후회와 갈등이 있었다"며 "현주컴퓨터에 대한 애착과 연민 등으로 결국 PC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무너신 '용산PC신화'

현주컴퓨터는 1989년 11월 김 대표가 단돈 30만원으로 서울 용산전자상가 매장 한구석을 월 12만원에 임대해 시작됐다. 이후 공대와 PC동아리 등 대학시장을 개척해 1999년 컴퓨터 업계 3위까지 올랐던 회사다.

한때 매출이 3000억원을 넘어서기도 했으며 2000년에는 코스닥에 입성, 벤처신화를 이어가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국내 PC시장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수익성이 악화됐고 2003년 구조조정 단행시 노동조합과의 갈등 등이 불거지면서 김 대표는 2004년 2월 현주컴퓨터를 떠났다. 현주컴퓨터는 2005년 4월 부도가 났다.

이후 김 대표는 현주컴퓨터 연수원으로 지으려 했던 부지를 활용해 강원도 춘천에서 숙박시설인 한마음리조트를 열었고 이 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PC 사업

김 대표는 "현주컴퓨터를 떠난 이후 아쉬움이 많았으며 특히 앞으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컴퓨터 제조·유통 사업을 다시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안(異眼)이라는 회사 이름처럼 다른 생각, 다른 기술, 다른 서비스로 새로운 컴퓨터 세상을 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현재 이안컴퓨터의 직원수는 15명 정도이며 대부분이 현주컴퓨터 출신이다.

김 대표는 "이들 모두 현주컴퓨터를 창업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고객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마음 가짐으로 국내외 컴퓨터 분야를 리드해 나가는 선도기업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안컴퓨터는 일부 신문매체에 광고를 게재, 본격적으로 마케팅에 뛰어든 상태며 오는 16일 15.4인치 노트북을 출시할 예정이다.

 

*자료: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현주컴퓨터 창업자 '김대성'씨 LED업계 투신

2010년 01월 06일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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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벤처신화’ ‘용산신화’로 불리는 현주컴퓨터의 창업자 김대성씨가 LED업계에 투신했다.
 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김대성씨가 지난달 LED조명 업체인 화우테크놀러지(대표 유영호) 국내영업본부장(부사장)으로 부임했다. 


 이에 따라 화우테크놀러지의 사업이 어떻게 변모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화우테크놀러지는 일본 등 해외 수출에서는 상당한 입지를 구축했지만, 국내에서는 동종업계 회사들과의 경쟁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김대성씨는 지난해 11월 주요 일간지에 본인을 소개하는 특이한 구직광고를 게재하면서 전문경영인으로 나서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해 주목을 끌었다. 이에 걸출한 영업맨을 필요로 했던 화우 측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져 영입이 성사됐다.

 

 김대성씨는 용산전자상가의 PC조립업체로 출발한 현주컴퓨터를 지난 1989년 창업했다. 김 부사장은 PC 구매 후 2년뒤 반값 보장 등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마케팅 기법을 동원, 1998년 400억원대 매출에 이어 수직상승곡선을 그리며 2000년에 3000억원을 돌파, PC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듬해 코스닥에도 상장, 벤처신화를 일궜다. 하지만 국내 PC시장의 경쟁 심화, 획기적이라고 여겨졌던 마케팅은 부메랑으로 돌아왔으며 노사 갈등 등으로 2004년 현주컴퓨터를 떠났다.

 

 이후 김대성씨는 2006년 12월에는 이안컴퓨터라는 PC업체를 세웠다. ‘컴퓨터가 보여주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모토로 현주컴퓨터에 이은 또한번의 PC 신화를 노렸지만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성인·안석현기자 siseol@etnews.co.kr

 

김대성 분해해부 자료